연구원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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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기계의 이해

성장기

제 4장 : 성장기(1980년대)

경제 안정기

5차 경제사회발전계획

1979년의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와 법적 권력승계 원칙에 따라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으로 취임하지만 정치적 기반이 약했던 최규하 정부를 거쳐 전두환 대통령의 취임에 이르는 국정의 혼란기에도 경제개발 계획은 차질이 없이 진행되어 4차에 걸쳐 국내 산업을 성장가도로 달리게 했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경제사회발전계획으로 그 명칭을 바꾸고 1980년대에 이르러 제 5차, 6차 경제사회발전 계획을 통하여 성장보다는 안정 능률 균형에, 그리고 어느 정도의 경제성장의 결과물을 공유시키기 위함을 바탕으로 국민 복지 증진과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의 도약의 발판을 구축하는데 그 중점 추진 목표를 두었다.

특히 제5차 경제사회발전계획은 (1982년~1987년)은 이때까지 계획의 기조로 삼았던 성장을 빼고 안정능률균형을 기조로 하여 물가안정개방화, 시장경쟁의 활성화, 지방 및 소외 부문의 개발을 주요정책 대상으로 하였다.이 계획의 가장 큰 성과는 한국 경제의 고질적 문제였던 물가를 획기적으로 안정시킨 것이며, 이를 바탕으로 1986년부터 3저현상(유가, 금리, 환율)의 유리한 국제환경변화를 맞아 경상수지의 흑자전환, 투자재원의 자립화로 경제의 질적 구조를 튼튼하게 하였다.

6차 경제사회발전계획

반면 제6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계획(87~91)은 '능률과 형평을 토대로 한 경제선진화와 국민복지의 증진'을 기본목표로 설정하고, 21세기에 선진사회에 진입하기 위한 제1단계 실천계획으로 수립되었다.
특히 흑자기조로의 전환에 따라 선진국의 보호주의 압력과 대내적인 소외부문의 소득보상욕구가 더욱 커지게 되어, 이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으로 자율 경쟁 개방에 입각한 시장경제 질서의 확립, 소득분배 개선과 사회개발의 확대, 그리고 고기술부문을 중심으로 한 산업구조의 개편을 중점과제로 삼게 되었다. 그 결과 경제성장률은 목표 7.5%를 상회하여 10%를 달성하였으며, 실업률은 2.4%로 고용안정을 가져왔고, 저축증대에 노력한 결과 국내저축률은 당초 예상보다 높은 36.1%에 이르렀다.

한편 수출의존도는 계획보다 낮은 26.4%로 떨어져 경제기반이 보다 탄탄해졌으나 물가는 예상보다 높은 3.3%로 억제하는 데 그쳤다. 국제수지면에서 수출은 계획보다 늘어났으나 수입이 더 크게 증가하여 87억 달러 적자를 기록, 흑자기조 정착에는 실패하였고, 산업구조는 제조업의 비중이 1991년 28.5%로 낮아지고, 농림어업도 7.7%로 떨어진 반면, 기타 서비스 부문은 크게 늘어났다.
지역간 균형에도 힘쓴 결과 도로포장률은 목표 70%를 웃도는 76.4%를 이룩하였다. 이에 따라 사회계층의 중산층 형성과 동시에 서민들의 생활 형편도 많이 괜찮아 졌고 여가생활, 문화생활도 많이 누릴 수 있게 되었다. 1980년대의 뚜렷한 사회적 변화의 한 축은 민주화운동이 고조되면서 노동운동도 활성화되었으나 5·17비상계엄확대조치로 다시 소강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6월항쟁 이후

88올림픽과 건설경기 수요 신장

그러나 1987년 6월항쟁 이후 7월, 8월 노동자대투쟁을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노동쟁의가 발생하면서 다시 활기를 되찾게 되고 이 시기에는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 대우조선 등 대기업의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노동운동이 과격화장기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그 결과 신규노조가 급증하게 되었고, 기존의 한국노총에 대한 어용화시비가 일면서 1990년 1월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가 결성되었다.
또한 88올림픽 유치를 통하여 올림픽을 전후한 수치적인 경제적효과는 16일간의 290만 관광객 유치와 연 TV 시청 인원 104억명의 방영권 수입 3억 9천만 달러의 직접적인 효과 외에 1982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사회 기반 시설의 정비 및 확충을 위한 4조 7500억원의 총 생산 유발과 약 34만명의 고용유발을 바탕으로 한 대규모의 건설토목공사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제반 여건과 함께 국가 경제 규모의 확대에 따른 기간산업의 확장,국민생활 수준의 질적인 향상으로 주거 생활의 안정과 생활환경의 개선에 대한 욕구가 높아지고 신도시건설, 지하철공사, 올림핌 특수와 더불어 노동임금의 상승, 노동력의 부족에 힘입어 건설기계의 수요 또한 급격한 증가를 보여 1980년대초 2만 여대의 등록대수가 1990년도에 이르러는 10만대의 등록으로 1980년대의 10년간에 무려 5배의 놀라운 신장과 1990년도의 당해년도의 등록대수가 3만여 대를 보일 만큼 건설경기의 수요는 가히 폭발적이였다고 할 수 있겠다.

국내 업체의 경쟁력 재고와 한계점

특히 노동임금의 상승과 5톤 트럭으로 운반이 가능하여 민첩성을 더한 소형굴삭기의 보급이 시작되면서 이제는 사람의 손을 대신하는 건설기계의 수요가 놀라울 정도로 증가하였고 국내 교통 여건의 부족으로 인해 민첩성을 가진 휠굴삭기가 다른 나라의 경우와는 달리 두드러진 증가세를 보이기 시작하여 오늘 현재에도 휠굴삭기의 경우 세계 시장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음이 특기할 만한 변화라 할 수 있겠다.

<표-5>에서 보듯이 건설기계 등록 구성의 측면에서의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1970년대 대비 도저의 구성비가 현저히 줄어든 반면 굴삭기의 구성비가 매우 신장하였고 구성비 측면에서도 가장 높은 28%를 점하게 되어 굴삭기가 건설현장에서 그 용도의 다양성으로 인해 가장 많이 사용되어지는 건설기계가 되었다.
이는 국내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구성비에서도 비슷한 현상을 보이고 있으며 도저, 로우더는 현 시장규모의 유지 또는 감소에 비해 굴삭기의 시장은 타 기종에 비해 계속 신장세를 보이고 있으며 세계 수요측면에서 볼 때 단일 기종으로서는 10만대(미니 굴삭기 제외, 10톤이상) 이상의 시장 규모와 경쟁 또한 치열하여 관련 기술발전의 속도 또한 타 장비에 비해 월등히 앞서나가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1980년대의 건설기계 산업에는 1970년대의 기술제휴에 의한 단순 조립 생산단계와 산업합리화 정책에 의한 보호정책으로 시작한 생산 공급의 자립화 단계를 거치면서 핵심부품의 국산화 생산 노력과 독자 기술의 확보를 위한 기술개발이 박차를 가하여 1980년도 중반에 이르러 각사가 자체 설계에 의한 독자 모델을 발표하기시작할 뿐 아니라 주문자 상표 부착방식(OEM)에 의해 수출을 시작하기도 했다. 또한 산업합리화 조치의 완화에 따라 많은 기업들이 건설기계산업에 참가하게 되며 국내에서도 본격적인 경쟁체제를 통한 경쟁력 강화가 시작되었고 신규업체의 참여함에 따라 국내 건설기계 제작사가 20여개사로 늘어 나게 되었다.
그러나 건설기계산업의 제작 기술 수준에서 볼 때 생산기술은 선진국 수준에 근접했으나 설계기술은 아직 초보단계를 면하지 못한 상태였으며 건설기계의 주요 핵심부품인 유압기기, 전자 제어 관련 주요 부품등은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는 상태였으며 종합적인 제품의 기술경쟁력은 선진장비에 비해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80년대의 건설기계산업

유압기술의 성능향상

굴삭기에 관련한 적용 기술측면에서 보면 유압과 관련한 많은 기능의 개발적용이 가장 두드러진 시기라 할 수 있을 만큼 유압식 조작장치의 적용과 함께 각 작업장치의 제어의 조화를 위한 각종의 유량 분배 조정기능 주행직진 등의 여러 유압 관련기능들이 메인콘트롤 밸브에 조합 내장 되어 작업 기능의 개선 뿐만 아니라 주행 속도의 2배속화를 통한 장비 주행속도의 고속화, 선회장치에 자동 브레이크를 제공하여 경사지에서 보다 안정된 작업성을 보장함과 동시에 유압 시스템의 고압화를 통한 작업 성능 향상과 효율성 향상을 동시에 도모할 수 있었다.

80년대의 의의

1980년대의 성장기로써의 주요 특징은 앞서 언급힌 바와 같이 독자 모델 및 주문자상표 부착방식 등에 의한 수출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으며 1986년 이전까지의 총 수출 실적 6,800여대에 비해 1990년도의 경우 3만여대를 생산하여 2만 5천여대를 수출하는 수출 산업으로 자리매김을 하는 실적을 보였으나 주로 주문자 상표 부착 방식에 의한 수출이었으며 독자 브랜드에 의한 수출은 뿌리를 내리기 시작된 시점이라 할 수 있겠다.

특히 지게차의 경우는 주문자 상표 부착방식에 의해 간접 수출이 주로 이루어진 반면 오늘날 건설기계 수출의 주종을 이루는 굴삭기의 경우를 보면 1980년대 중반기까지 각사가 독자 모델을 준비하고 튼튼한 내수시장에서의 충분한 품질 검증을 바탕으로 하반기부터 각종의 세계 유수의 건설기계 전시회에 참가와 판매 서비스를 위한 해외 딜러망의 구축이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미미하나마 수출산업으로의 첫 움직임을 시작했다.
특히 기술제휴시 선진국 대비 가혹한 국내사용환경 예를 들어 국내의 지형조건상 암반 작업장에서의 내구성 부족 그리고 가동시간 측면에서도 선진국 보다는 가혹한 조건에서의 가동으로 발생한 여러가지 기술적인 문제점을 해결하면서 습득한 경험을 바탕으로 튼튼한 한국형 장비를 개발함과 동시에 선진국 대비 제반 사회 저물가에 힘입은 원가경쟁력은 당시 일본, 독일, 미국 및 이태리의 주도적인 세계 굴삭기 시장에서 당당히 한자리를 잡게 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경쟁력이 있는 제품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와 같이 1980년대 건설기계산업 성장기의 주요 특징은 경제 개발 계획의 성공적 추진, '88 서울 올림픽특수 등으로 계속 증가되는 국내 수요를 바탕으로 많은 기업이 건설기계에 참여 하면서 본격적인 경쟁체제로의 돌입을 들 수 있고 끊임없는 국산화의 노력과 기술개발의 결실로 독자 모델의 개발 성공으로 수출을 시작하게 된 시기라 할 수 있다.